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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를 즐기기 위한 작품 추천(문학, 영화, 게임)/고전 작품

호메로스 - 일리아드

(* 아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한 글이 아니며, 작품 해설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해석하여 가져와 정리한 것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Peter Jones 해설문 중 발췌-

영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한 인간의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대작의 중심 주제는 결국 아킬레우스가 제기하는 '한 삶의 값은 무엇인가?' 이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고찰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요소를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호메로스는 전투를 '인간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곳' 따위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 승리와 그것의 대가 - 물질적, 사회적 대가는 - 호메로스의 영웅들에게 챙취해야 할 우선 순위었고 죽음 후에도 남는 kleos의 핵심이었습니다. 

둘째.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복잡하고 깊이 있는 성격이 부여된 인물들이었습니다. (생각 없는 살인 기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왠만하면 싸우고 싶지 않아했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자신보다 더 나은 전사라고 서슴없이 인정했고, 디오메데스도 의미 없는 모욕은 -그는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 넘겨버리고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욕을 잊어버린다는 말은 아니었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리아스의 세상 속의 '패배'란 곧 대체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싸움이 그 자체로 우상시되지는 않았다. (예외적인 인물로는 무신 아레스가 유일합니다.) (...) 영웅들은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호메로스도 반복적으로 이런 위대한 영웅들조차 가족에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이때의 그리스 군대는 현재의 군대와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합니다. 아가멤논은 그가 데려온 군사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점에서 전반적 지도자가 되었지만, 끊임없는 논쟁이 보여주듯이, 이 자리는 그냥 넘겨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가 마주한 문제는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그의 삶은 짧을 것으로 예언되어있기때문에 영원한 영광을 쌓을 시간이 제한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삶'이란 특별히 더욱 극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인간의 삶의 가치란 무엇일까요?
  아킬레우스는 이 문제의 답을 BOOK 18에서 준다.

  아킬레우스에게, 인간의 삶은 그의 사랑하는 동반자를 죽인 자에게 복수를 함으로써의 가치를 얻습니다. 이것은 여러 의미로 끔찍한 결정이었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사형 영장에 스스로 서명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여러 의미로 영웅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킬레우스에게 너무나도 중요했던 - book 1에서 볼 수 있듯이 - 호메로스의 세상의 물질적 보상과 영웅의 호칭은 이제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아킬레우스는 영원한 영광을 얻기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일리아스는 세상의 첫번째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시인들이 처음으로 무대라는 미디움을 발명하기 200년 전, 호메로스는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라는 캐릭터 속에 이미 '비극'의 핵심을 찾아내었습니다. 신적 조상을 가지고 있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영웅, 그가 스스로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그의 세상이 잿더미가 되고, 자신의 행동으로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짐으로서 위대함을 보여주는 영웅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죠. 

시와 역사, 사실과 허구 : 트로이 전쟁은 실제했을까?

  호메로스의 시은 그 형식은 구전적이고 사용한 언어는 고대의 것입니다. 서사시는 B.C. 1100년 쯤에 끝난 '메카도니안' 시대, 또는 '청동'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구전 시인들에 의해 전승되어 내려왔지요. 아마 그렇기에 B.C. 700년대 사람인 호메로스가 호메로스의 시대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을 청동 갑옷이나 전차(Chariot) 위의 전투 따위를 알고 있고, 메카도니아를 '황금이 풍부한' 도시로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리움 지역을 중심으로 한 트로이와 그리스 사이의 전쟁 또한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았을까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일리아스가 트로이 전쟁의 구체적인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첫째로, 구전 서사 시인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품을 짓는 역사학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호메로스 서사시 또한 메카도니안 사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거의 담고 있지 않지요. 호메로스의 작품을 통해 경제적으로 복잡한, 왕궁 중심의 사회를 기록하기 위해 그 당시 청동기 사람들이 문자(Linear B)를 사용했다는 것을 추측해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구전 서사 시인들의 목적은 영웅성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 - 전투와 모험을 통해 영광과 명성을 얻고, 이것이 불러일으킨 문제 - 이었습니다. 호메로스도 마찬가지었죠. 예를 들어 (호메로스보다 훨씬 오래된) 바빌로니안 길가메시 서사시는 일리아스의 몇 부분과 놀랍도록 비슷한 요소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목적의 스토리텔링이 그 당시 지역 민간 전승과 신화의 소재와 전개를 따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특성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이미 일리아스의 민간 전승적 요소를 지적했죠 - 실제 현실에서는 그 어떤 왕도 아들이 외국인 여자를 데려왔다고 해서 자신의 왕국이 침략을 받고, 그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백성들의 삶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거라구요.)
  셋째로, 그리스 세계의 호메로스(와 시인들)는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오래된 전통 - 모든 영웅 서사시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구전 전승 구조-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전형적인 '주제'를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일리아스의 첫 번째 Book은 소개, 간청(supplication), 기도, 신적 방문, 회의를 모으고 끝내는 것, 배를 통한 여행, 희생 그리고 식사와 여가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전 전승의 보편적인 구조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하자면,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일리움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청동기 시대 그리스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노래나 전승되어 내려오는 서사시가 없었다고요. 만약 실제로 그리스가 일리움을 공격한 사실이 있다면, 이에 대한 400년동안 구전 전승이 내려오는 동안 역사적 요소가 전부 소실될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당시 B.C. 8세기 즈음의 창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트로이의 남쪽에 있는 - 그리스인들에게는 아이오니아로 불려진 - 지역에서 살고 있던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 관객들의 요구를 위해 창작된 작품이라고요.  

 

  하지만 과연 이게 끝일까요?
  일리아스가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보통 픽션은 역사를 완전 배제하지 않죠. 우리가 자주 읽는 소설도 창작된 이야기지만 실제 세상을 반영하려고 하니깐요. 호메로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일리아스의 경제적 배경은 대체로 농업이고, 고대 사회는 전반적으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의 농부들과 같이, 전사들 또한 땅을 경작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세계를 가릴려고 하지 않으며, 불타는 전투 묘사 속에서도 이런 모습은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양떼를 목초하는 것은 하루 동안 해야 할 주요 업무였으며, 영웅들은 Bucolion 처럼 풀밭 위의 님프를 만나거나, 파리스(Paris)와 아이아네아스의 아버지 안키세스(Anchises)처럼 여신을 만나기도 하고, 안드로마케(Andromache)의 남동생들이 -불행하게도- 그랬듯이 아킬레우스(Achilles)를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다이오메데스(Diomedes)는 말을 기르고,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의 말에게 먹이를 주고, 판다로스(Pandarus)는 그의 말을 돌보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프라이엄(Priam) 왕은 그의 아들들을 양과 소떼 도둑으로 몰거나, 헥토르(Hector)의 죽음 소식을 듣자 절망으로 안마당 거름더미 위에 구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일리아스의 전투적, 영웅적 세계에는 지속적이고 현실적인 묘사가 녹아있습니다. 
  또 고려할 점은, 트로이에 모인 그리스 군인들에 대한 호메로스의 묘사에 담긴 정치적 상징입니다. 한 순간에는 뜻을 함께하는 '무리'처럼 보이던 이들은 다른 순간에는 그리스 전역에서 모인 느슨한 집단인것 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각각의 장군들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갈등을 빚습니다. 이 모습이 진짜라면, 군대의 상황은 호메로스 동시대의 사회상 - 점점 '민주적인' 도시국가가 등장하면서 구시대적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경쟁하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한편으로는 실제 과거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나타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호메로스가 '벽으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살고 있는 영웅'들을, '청동 무기를 쓰며 청동 갑옷과 청동 정강이 받침을 입고, 전차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또는 미케네가 '부유한 황금의 도시'임을 묘사한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마지막으로, 호메로스가 '트로이(Troy)'라고 부른 지역에서 번성한 도시의 잔재를 고고학자들이 찾아낸내었습니다. 모험가 Heinrich Schliemann이 1870년 부터 1890년 사이 발견한 그 지역의 흙무덤은, 터키어로 '히사를리크(Hisarlik)'이라고 불리며, 그곳에 남겨진 유적으로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움'이라고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고고학을 통해 이 도시는 B.C. 1200년경 공격을 받기도, 포위를 당하기도 했으며 청동기 시절 그리스인들과 접촉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죠. B.C. 5세기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가 트로이 전쟁이 실제 그 쯤때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던 것도 흥미롭습니다. 10년동안 포위당했다기에는 Hisarlik가 너무 작지 않나-라는 주장에는 Schliemann이 최초 찾은 유적지는 그저 중심 성일 뿐이고, 새로운 발굴을 통해 이 도시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10배정도는 더 크며, 남쪽으로 뻣어 있고 큰 규모의 도랑으로 둘러쌓여 있었다는 발견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Hisarlik (Tr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