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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 테베 3부작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SsengNim
2021. 2. 14. 11:27
(* 아래 글은 제가 직접 작성한 글이 아니며, 작품 해설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을 해석하여 가져와 정리한 것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 Bernard Knox 해설 중 발췌
소포클레스가 지었다고 알려져있는 123개의 극 중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7개 밖에 없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일곱 개의 왕문의 도시, 테베스 사가(3부작)에 관한 것이죠. 이 3개의 극이 상영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근거에 따르면 안티고네(bc 442년), 오이디푸스 왕(bc 430년), 콜로노스이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의 죽음 이후) 순서로 무대에 올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를 알고 계신 분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이것은 물론 신화 사건순대로는 아닙니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화는 이미 그 지역에서 아주 다양한 방법과 버전으로 전해져왔던 오래된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창작한 드라마 버전이 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죠. 지금 독자가 읽기에도 소포클레스가 작성하고, 그 당시 관객들이 보았을 순서대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입니다. 비참했던 전쟁이 전의 '안티고네', 전쟁의 초반과 bc 429년에 아테네에 있었던 전염병 이후에 올려진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전쟁의 잔인했던 후반부에 작성되었던, 늙은 노인이 되어버린 시인이 늙은 노인에 대해 적은 극이며 그 시인의 죽음 후에 무대 위에 세워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순입니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 기울어가는 델포이의 영향력과 신화에 대한 믿음
델포이 신전은 당시 그리스 전역의 지도자들, 사람들과 연결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부와 정치적 권력은 엄청났죠. 하지만 B.C. 5세기 말, 특히 아테네에서는, 이런 예언과 종교적 전통에 대한 믿음이 공격받고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서 '요즘 것들'은 더 이상 이전 세대만큼 신과 신탁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죠.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한 남자의 인생 - 아폴로의 예언을 거부하기 위해 도망치고,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모든 예언에 대해 거만해하지만, 결국 자신이 오래 전 그 예언을 다 했다는 것을 알게되는- 과 비극의 주제로 선택함으로써 당시 굉장한 중요성이 있는 논란을 다루었던 것이다.
- 오이디푸스와 자유의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드라마의 핵심은 '플롯'입니다. 플롯은 우리가 무대 위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하는 핵심이죠. 하지만 우리, 관객, 독자는 우리가 읽는 인물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과 그의 고통 사이에 의미있는 연관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한 주인공이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려면 애초에 그의 행위가 '자유'로워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극 속 주인공은 분명히 자유 의지를 통해 행동해야하고, 그의 자유는 그가 겪을 고통과 연관이 있어야만 합니다. 주인공은 '운명'에 갇혀있을 수 없죠. 누가 주어진 예언대로만 행동하는 주인공에 대해서 읽고 싶겠어요?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과연 자유로울까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극 속의 오이디푸스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극은 오이디푸스 본인이 자신의 예언을 이루었다는 발견을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에 걸린 저주와 이를 풀기 위한 방법,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밝히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 곧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입니다. 그리고 이런 '발견의 과정'은 온전히 오이디푸스, 본인의 선택이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우리에게, 오이디푸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진실은 절대 밝혀지지않았을 것이라고 설득하죠. 오이디푸스는 자유로운 선택으로,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그가 어릴 때 내려진 예언이 이미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오이디푸스의 영웅적 성취는 진실의 발견이고, 이 발견은 무대 위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절망적인 비극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자유 선택을 통해 얻은 진실 -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치- 은 그의 결말에 의해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자유의지는 곧 비극을 낳는다고, 신의 비웃음을 사게 되죠. 하지만 극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첫번째 생각은 - 우리는 메신저의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됩니다 - 자결이었습니다. (심지어 칼을 부탁하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의 눈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서 피를 흘리는 가면을 쓴 채 무대 위에 등장하며 코로스에게 외칩니다.
"아폴론이었소, 내 친구들. 아폴론. 그가 나의 절망을 예언했소. 이 고통 위의 고통을!
하지만 내 두 눈을 찌른 손은 내 것이었소. 내 것,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소. 내가 나에게 했소!"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진실을 찾거나, 찾지 않을 자유였죠.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자유의지에 관한 오래된 논쟁으로 사용했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적인 소재를 나름의 답을 내놓은 드라마로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유. 탐구의 자유, 그리고 이것을 영웅적으로 사용한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통해 결국 이 드라마를 운명의 그물에 갇힌 인간의 나약함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과 그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것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 자유만이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고 말이죠.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소포클레스의 아테네
소포클레스는 B.C. 406~5년 사이에 죽었지만, 아테네인들은 그의 마지막 작품을 B.C. 401년 봄 디오니소스 축제가 될때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5년 동안 아테네인들은 이래없던 완벽한 패배와 무조건적인 항복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B.C. 401년에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본 관객들은 깊게 감동했을 것입니다. 이 극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도, 황금기의 아테네인들의 영광을 그리는 극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죽기 전, 아테네가 패배, 또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극에서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를 아테네, 정확히는 본인(소포클레스)이 태어났던 가까운 마을인 콜로노스로 데려온다. 이곳에서 테베로부터 온 눈이 먼 추방자는 아테네의 보호를 얻고, 보답으로 미래에 있을 아테네와 테베의 전쟁으로부터의 승리를 보장해줍니다. 아테네 도시에게 입양된 오이디푸스는 더 이상 힘없는 거지, 갈 곳 없는 난민이 아니라 아테네의 시민이 되었고, 코러스는 다시한번 -소포클레스가 사랑했던,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아테네의 찬가를 부른다.
디오니소스와 짙은 색의 덩쿨을 아틱 농촌의 와인 뿐만 아니라 극장과 극장을 낳은 도시의 영광을, 수선화는 하데스에게 납치된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 그리고 그들을 숭배했던 신비로운 엘레우시스 비의와 트립톨레모스를,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에게 준 선물인 올리브를, 포세이돈 신이 아테네에게 준 선물인 말과 배를...
하지만 이런 아테네의 영광을 부르는 가사에는 슬픔또한 느껴집니다. 찬송가은 동시에 레퀴엠입니다. 노래하는 나이팅게일은 애가를 부르는 새이며, 수선화와 크로커스는 무덤가에 피는 꽃입니다. 소코를레스가 이런 멋진 가사를 지을 동안 아테나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패배는 코앞까지 다가왔고, 침략한 군대는 아테나 농가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었죠. 영원할 줄 알았던 아테나의 끝을 보고 있던 소포클레스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극을 쓰고 있었을까요?
오 테세우스여, 나의 친구여. 늙지 않는 것은 신들 뿐이라네. 신들만이 절대 죽지 않지. 세상의 모든 다른 것들은 강력한 '시간'이 흔적도 없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파괴해버린다네. (685~89)